로고

도서판매현황
 
마케팅정보_top 언론사 미디어 블로그 서점 저자와의만남

도서판매현황 웹하드
언론사_title

 
 
영화 '인천상륙작전' 실제 주인공 함명수 前 해군참모총장
 


영화 '인천상륙작전' 실제 주인공 함명수 前 해군참모총장


영흥도 거점으로 북한군 정보 수집 섬주민 모두가 첩보부대 도와 훈장은 그들이 받았어야…
아군 2명은 기밀 지키기 위해 포로 되기 전 권총으로 자결 박대통령에 폭탄주 전수? 英해군장교들 병사 사기 높이려
맥주잔에 양주잔 넣어 주는 전통 '폭뢰주' 선보인 적 있어 군인은 본분에 충실해야 포 사격 훈련 많이 시켜 돈 많이 쓴다고 욕먹었지만 평시에 땀 흘리며 연습해야 戰時에 피 적게 흘려  1950년 8월 24일 새벽 1시 30분, 어선 백구(白鷗)호가 인천 영흥도 십리포 해안에 상륙했다. 17명의 청년이 배에서 내렸다. 스물두 살의 함명수(咸明洙) 소령이 이끄는 우리 해군 첩보부대원들이었다. 22일 후인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X-레이 작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들은 영흥도를 거점으로 월미도와 인천에 잠입한 뒤 북한군 해안포대 위치와 수, 병력 배치 등 고급 정보를 수집해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했고, 맥아더 원수는 이를 토대로 상륙작전을 실시했다. 맥아더가 "한국 해군을 다시 보게 됐다"고 말할 정도로 X-레이 작전에 참여한 우리 해군첩보부대를 극찬했다고 한다. 27일 개봉하는 '인천상륙작전'은 X-레이 작전에 참여한 해군의 활약을 그린 영화다. 

당시 함명수 소령과 작전 중 전사한 고(故) 임병래 소위, 고 홍시욱 삼등병조(하사) 등 3명은 미국이 외국군에게 주는 최고훈장인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12일 서울 해군회관에서 만난 함명수(88) 전 해군참모총장은 "첩보부대원도 훌륭하게 잘했지만 훈장은 당시 영흥도 주민이 받아야 했다"고 말했다. "영흥도에 도착하고 나서 깜짝 놀랐어요. 북한은 그해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이후 이승엽을 서울인민위원회 위원장(서울시장)으로 앉혔는데, 영흥도가 이승엽 고향이었어요. 섬에 친척이나 아는 사람이 많았을 거 아녜요. 그런데 남녀노소 모두 첩보부대를 도와줬어요. 어민들은 인천 왕래하는 배를 서로 내주겠다고 하고. 섬 주민들이 협조하지 않았었더라면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을 겁니다."

첩보작전요원으로 총각만 뽑아

―부대원 17명 모두 총각이었다고요.

"전부 독신자로 뽑았습니다. 가족한테 작전을 누설할 수도 있으니까요. 약혼녀에게 아무 연락도 못 하는 바람에 파혼당한 대원도 있었어요. 떠나기 전 부산 자갈치시장에 모여 소주를 나눠 마신 후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을 깎아 각자 사물함에 넣었어요. 작전 중 전사하게 되면 그거라도 유족에게 남기려고요."

―선물로 받은 중령 계급장을 바다에 던졌다고요.

"대원들이 제가 작전을 앞두고 중령으로 상신됐다는 걸 알고 인천으로 향하는 배에서 계급장을 선물했는데 그걸 던졌지요. 부대원들에게 '내가 중령 계급장 다는 것보다 이 작전 성공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그랬지요."

―작전은 어떻게 진행됐습니까.

"김순기 중위와 임병래 소위가 인천에 잠입해 북한군 보안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권씨라는 사람을 만났지요. 김 중위가 인천경비부에서 근무할 때 권씨를 정보원으로 활용했었습니다. 권씨가 '살기 위해 북한군에 협조하고 있을 뿐 대한민국 해군에 충성하겠다'고 하더군요. 권씨 통해서 통행증을 만들 수 있었고, 대원들이 월미도 방어진지 구축 공사장 등에 위장 취업해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X-레이 작전에서 2명이 전사했지요.

"인천상륙작전을 이틀 앞둔 9월 13일 철수 명령이 떨어졌어요. 잔무 처리를 위해 첩보대원 6명을 섬에 남겼습니다. 그런데 9월 14일 북한군 대대병력이 영흥도로 쳐들어왔어요.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삼등병조가 적을 유인하는 사이 나머지 대원 4명이 숨겨 놨던 보트로 탈출했습니다. 섬에 있던 의용대원에 따르면, 임 소위와 홍 삼등병조는 권총으로 자결했다고 합니다. 포로가 돼 고문을 이겨낸다는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습니다. 기밀을 지키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한 거지요."

몽금포 작전서 다리 잃을 뻔

함 제독은 일제 강점기였던 1928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시 최고 수재들이 갈 수 있었던 평양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수학을 매우 잘했다고 한다. 함 제독은 광복이 되자 수학교사 대신 군인의 길을 택했다. 1946년 2월 해군사관학교 전신인 해군병학교에 1기로 입교했다. "해방 이후 상당히 혼잡했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군대에 힘이 있어야 한다는 걸 절실히 느꼈어요. 군인의 길을 걷는 게 나라를 위해 제일 충성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1946년12월 함 제독을 포함해 61명이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해군 작전국 정보과장(소령)으로 있던 1949년 8월 몽금포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북한에 빼앗겨 황해도 몽금포항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미 군사고문단장 윌리엄 로버츠 준장의 전용보트를 탈취하거나 폭파하는 임무였다. 북한군 경비정 4척을 격침하고 경비정 1척을 나포했으며 북한군 12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함 제독은 총상을 입었다. 왼쪽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고 오른쪽 무릎뼈가 깨지는 중상이었다.

―몽금포항에 로버츠 준장의 보트가 없었죠.

"그래서 인민군 배라도 폭파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죠. 그런데 적함에 오르다가 총에 맞았어요. 처음에는 어떤 놈이 뒤에서 나를 야구방망이로 때리는 줄 알았어요."

―부상으로 다리를 잃을 뻔했는데요.

"병원에 입원했더니 한쪽 다리를 잘라야 한다더군요. '군대를 떠나 수학 교사가 될 운명이구나' 생각했는데, 미군 측에서 나를 주일미군 병원에 보내 수술을 시켜줬어요."

―부상당하고 약 1년 만에 X-레이 작전에 자원했습니다.

"약 먹고 다리를 절면서 작전에 나섰죠. 나라가 풍전등화인데 누구나 그랬을 겁니다. 내가 그때 해군본부 정보국장으로 있어서 누구보다 상황을 잘 알지 않았습니까. 제가 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을 찾아갔더니 '또 지휘하려고 하느냐'면서도 허락하더군요."

몽금포 작전은 우리 군 최초의 대북 응징 작전이었지만, 최근까지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북한이 몽금포 작전 때문에 6·25가 발생했다고 선전해왔기 때문이다. 군 당국은 몽금포 작전 66년 만인 작년 9월 인천 월미공원에 몽금포작전 전승비를 건립했다. 함 제독은 그를 구출한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6대)과 함께 올해 4월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김종필과 함께 함명수(왼쪽) 제독이 1965년 해군참모총장 재직 당시 여름휴가를 맞은 박정희(가운데) 대통령과 김종필 민주공화당 당의장과 함께 경남 거제시 저도에서 불고기를 구워먹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김종필과 함께 함명수(왼쪽) 제독이 1965년 해군참모총장 재직 당시 여름휴가를 맞은 박정희(가운데) 대통령과 김종필 민주공화당 당의장과 함께 경남 거제시 저도에서 불고기를 구워먹고 있다. / 함명수 제공
 
박정희 전 대통령과 '술친구'

함 예비역 제독은 "맹물만 마시고 얘기하긴 싱겁다"며 맥주를 주문했다. 그는 소문난 애주가다. 젊은 시절엔 안주가 나오기 전에 맥주잔에 소주를 부어 석 잔을 마시는 것으로 술자리를 시작했다고 한다. 함 제독이 해군작전부장(준장) 재직 시절 해군본부가 있던 명동 부근 포장마차에서 군복을 입고 자주 술을 마셨는데, 구두닦이 소년들이 "해군 장성이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실 리가 없다. 가짜 별이다"고 신고해 헌병대가 출동했던 일도 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는데, 이 역시 술과 연관이 있다. "5·16 당시 저는 해군참모차장이었지요. 그때 혁명군으로 참여한 해병대가 영등포에 있던 해군본부 앞을 지나는데 해군이 해병대에 정지하라고 하면서 양측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어요. 이 일로 해군을 벌줘야 했는데 참모차장이던 저한테 책임을 묻더군요. 옷을 벗기거나 혁명재판에 회부해야 한다면서요. 그런데 당시 이성호 해군참모총장이 '참모차장이 무슨 죄가 있느냐. 나를 벌하라'고 두둔해줬고, 저는 함대사령관으로 물러나기만 했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나중에 따로 불렀지요.

"군부에서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없다고 제 사생활을 싹 다 뒤졌지요. 그런데 나오는 게 없거든요. 저는 그때도 집 한 채 없이 셋방살이하고 있었어요. 박 대통령이 저를 불러서 술을 한잔하는데 '재산을 어떻게 관리했길래 돈이 하나도 없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제 재산은 국세청장이 잘 압니다. 술 마시느라 주세(酒稅)를 열심히 바쳐서 집에 재산이 없습니다' 그랬지요."

―박 대통령에게 폭탄주도 전수했다던데.

"영국 해군은 폭뢰주(Depth Charge) 전통이 있어요. 영국 해군은 배 안에서 술을 마시게 하는데, 장교는 스카치위스키, 병사들은 맥주를 마시죠. 장교가 가끔 격려 차원에서 병사들 맥주잔에 스카치를 담은 양주잔을 떨어뜨려 주는데, 그 모양이 폭뢰 같아서 폭뢰주라고 해요. 그걸 박 대통령 앞에서 선보인 적은 있지요."

해군총장 마칠 때까지 셋방살이

함 제독은 36세이던 1964년 9월 중장 진급과 동시에 제7대 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됐고, 1966년 9월 38세에 전역했다. 그때도 셋방 신세였다고 한다.

―언제 셋방살이를 면했나요.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역신고를 하러 갔는데, 각하께서 돈을 좀 주셨어요. 그때 손원일 전 총장의 누님께서 혜화동에 살고 계셨는데 새집을 지어 이사하시면서 저에게 집을 싸게 내놓으셨지요."

―그런데도 함 제독을 음해하는 투서가 많았다고요.

"제가 해군참모총장 취임하자마자 내 임기 동안에 장성 진급은 없다고 했고 실제로 그렇게 하니까 욕을 많이 먹었지요. 당시 동기인 해사 1기생들이 전부 장성으로 진급하니까 후배들이 별을 못 달아요. 그래서 해군을 개혁하려면 1기생은 더 이상 별 달면 안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불만도 많고 무능한 총장이라고 욕을 많이 했지요."

―식구들 불만도 많았을 텐데요.

"아내는 남편을 남하고 비교하게 돼 있어요.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야죠. 배 함장 하면서 포, 폭뢰, 엔진 등 전부 공부하려면 시간이 없어요. 계급이 올라가면 또 어떻게 싸울까 연구해야 하고. 나같이 머리 나쁜 놈은 나라 지키면서 돈 모을 재주가 없지요."

―해군에 전하고 싶은 얘기는요.

"제가 현역으로 있을 때 강조한 얘기가 있어요. '평시출한유다(平時出汗有多) 하니 전시출혈유소(戰時出血有少)라'. 평시에 땀 흘리며 훈련을 열심히 해야 전시에 피를 적게 흘린다는 얘기죠. 저는 하도 포 사격훈련을 많이 해서 돈 많이 쓴다고 욕도 먹었지만 군인은 역시 위국헌신(爲國獻身) 본분에 충실하도록 노력해야죠."

그는 함께 저녁이나 먹자며 국방부 근처 단골 삼겹살집으로 향했다. 앉자마자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채웠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바로가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7/22/2016072201435.html
 
   
 
 
회사소개 이용약관 개인정보취급방침 도서판매현황조회 홈으로 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