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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지은이 김선덕
  출판사 지식공감
  판형 152x210
  발행일 2017. 11.
  정가 13,000원
  ISBN 979-11-955026-9-1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은 초대 해군총참모장(참모총장)을 역임한 손원일(孫元一) 제독의 불꽃같은 삶을 다룬 평전(評傳)이다. 손원일 제독은 해군 불모지인 한국에서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해군을 창설한 선구자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해군의 아버지’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치하에서 벗어났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3년 동안 미 군정청(美 軍政廳)의 통치를 받게 된다.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손원일은 1945년 11월 11일에 해군의 전신인 해방병단(海防兵團)을 창설했다. 해방병단은 육해공 3군 중 가장 먼저 출발했을 뿐만 아니라, 국방부(1945년 11월 13일 창설)보다도 이틀 먼저 출범한 광복 후 최초의 공식적인 군 조직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조선인에게 일본 육군사관학교나 만주군관학교의 입교는 허용했지만, 해군사관학교의 경우에는 조선인을 단 1명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세계의 군사력은 해군이 좌지우지하던 상황인지라, 일본군은 비밀유지를 위해 조선인들을 해군에 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일반상선의 선원 출신인 손원일이 해방병단을 창설했다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창업(創業)보다 더 어려운 일이 수성(守成)’이라는 말이 있다. 손원일은 해군을 창설했을 뿐만 아니라, 해군 발전의 초석(礎石)을 놓은 인물이기도 하다. 손원일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해군의 청사진을 하나씩 그려 나갔다. 대원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일, 유능한 인재를 발탁하여 교육하는 일,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손원일은 초대 해군총참모장에 임명됐다. 미군정(美軍政)에서 벗어나 새 나라의 해군 총장이 된 손원일은 해군 발전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비록 대한민국 정부는 수립되었지만, 당시의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1949년 5월까지 대한민국 해군이 보유하고 있던 함정세력은 모두 36척이었다. 일본 해군으로부터 압수한 소해정(掃海艇: 기뢰를 제거하는 소형 함정)들과 미군이 지원한 소해정들이 주력 함정이었고, 나머지는 잡역선과 증기선, 상륙용 주정 등 함정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의 배들이었다. 손원일은 단 한 척의 전투함도 보유하지 못한 대한민국 해군의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고민을 거듭하던 손원일은 전투함을 구입하기 위해 1949년 6월 1일, ‘함정건조기금갹출위원회’를 구성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전투함 보유에 목말라 하던 해군 장병들이 적은 월급에서 일부를 떼어 기꺼이 내놓았다. 장교 부인들도 삯바느질로 모은 돈을 보탰다. 이렇게 하여 1만5천 달러가 모였다. 이에 크게 기뻐한 이승만 대통령이 전투함 구매에 보태라며 정부보조금 4만5천 달러를 내주었다. 6만 달러는 외환 사정이 어려웠던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손원일은 6만 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건너가 450톤 규모의 PC(구잠함 驅潛艦) 4척을 구입했다. 그 중의 하나인 701(백두산)함이 6·25전쟁이 발발하던 날 큰 활약을 하게 된다. 부산으로 침투하려던 북한군 특수부대 600여 명을 실은 선박을 침몰시켜 후방이 교란될 뻔한 위기를 막은 것이다. 손원일은 한국군 최고지휘관 중의 한 사람이면서도 최전선에 나가는 것을 꺼리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6·25전쟁의 전세를 뒤집은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인천과 월미도 등에서 첩보를 수집하기 위해 실시된 X-ray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였으며,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될 때는 장병들과 함께 인천 해안에 상륙하는 용기를 보였다. 또한 손원일은 전쟁 중에도 미래를 대비하는 혜안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미 해군 지휘부에 한국 해군의 전력증강 필요성을 수시로 제기하며 함정확보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6·25전쟁 기간 동안 미국으로부터 30여 척의 함정을 무상으로 인수하는 성과를 올렸다. 또한 손원일은 지금도 대한민국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는 ‘한미상호방위조약(韓美相互防衛條約)’을 성공적으로 체결한 주역이었다. 6·25전쟁이 끝나기 한 달여 전인 1953년 6월 30일, 손원일은 44세의 젊은 나이에 제5대 국방부장관에 취임했다. 손원일 장관의 첫 임무는 협의 중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일이었다. 미국 정부와 치열한 협상을 벌인 손원일은 결국 최대한 대한민국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한미동맹을 맺는 데 공헌했다. 손원일은 ‘해군의 아버지’이기도 했지만, 국군현대화의 기반을 닦은 ‘국군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손원일에게는 해결해야 할 일이 산적했다. 20개 사단으로 늘어난 육군을 효과적으로 재정비해야 했고, 육해공군의 무기와 장비를 현대화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전후복구사업에도 군의 힘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손원일은 국군을 재정비했다. 1953년 12월, 육군 제1야전군사령부를 창설하는 한편, 1954년에는 육군 제2군사령부와 육군교육총본부를 창설했다. 군을 작전과 군수, 교육의 3개 기능으로 나누어 보다 효율적인 지휘체계를 확립한 것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발효(1954년 11월 17일)를 앞두고 한미 양국은 ‘한미합의의사록’ 체결을 협의했다. 두 달여 동안 계속된 협의에서 손원일은 발군의 협상력을 발휘했다. 2억8천만 달러의 민간원조와 4억2천만 달러의 군사원조를 합해 총 7억 달러의 원조를 얻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호위구축함(DE)을 포함한 29척의 함정을 인수하고, 공군에 제트비행단을 창설하는 데 합의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 합의에 따라 ‘국군의 현대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던 인물. 오로지 자신의 신념에 따라 해군의 초석을 쌓은 인물. 국군현대화의 기반을 다진 인물. 이런 면에서 볼 때 손원일 제독은 임진왜란(壬辰倭亂)에서 조선을 구해낸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에 필적하는 인물이라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김선덕(金善德)

1961년 서울 출생

홍익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행정학 석사)

국방일보 기자로 7년, 국군영화 감독으로 10년,

그리고 국방TV PD로 12년, 도합 29년 동안

오로지 군 매체에서 봉직





저서

『실록 대한민국 국군 70년, 本紀 上』

『실록 대한민국 국군 70년, 本紀 下』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주역, 함명수』 列傳

『무적해병의 전설, 공정식』 列傳

『마지막 기병대장, 장철부』 列傳

『육군의 산파역, 이응준』 列傳

선구자(先驅者)는 먼저(先) 세상을 보고 앞서 가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손원일이라는 인물은 단연 선구자다. 선구자였던 손원일 제독은 언제나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18~19세기는 서양열강(西洋列强)들이 앞다투어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던 시기였다. 서양열강들이 전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만들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항해술(航海術)이 있었다. 유럽의 변방이었던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스페인, 그리고 섬나라 영국이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항해술 덕분이었다.

배를 타고 대양을 건너가 약소국을 침략하고, 그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어 지배하기 위해서는 항해술이 필수였다. 해군 함대를 이끄는 지휘관은 약소국을 점령한 후, 그 지역에서 총독(總督)으로 통치했다. 육군과 공군 장성을 장군이라고 하지만, 유독 해군 장성을 제독(提督)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바다를 지배하는 국가가 곧 선진국이었던 것이다.

서양열강의 야욕 앞에 아시아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어느 날, 바다 너머에서 건너온 서양열강들에게 아시아 국가들은 차례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예외였던 나라가 단 하나 있었다. 일본이었다. 일본은 개항(開港)을 요구해온 미국에게 순순히 문호(門戶)를 개방했다. 그리고 국력을 신장시킨 후, 서양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이웃나라들을 침략했다. 참으로 고약한 나라라고 아니할 수 없겠다.

일본에게 첫 번째로 당한 나라가 대한제국(大韓帝國)이었다. 그리고 그 망국(亡國)의 땅에서 손원일은 설움을 감수하며 유년기를 보냈다. 17세의 소년 손원일이 상해에 처음 발을 딛던 1926년 당시의 상해는 서양열강의 해군 함정들과 상선들이 모여드는 국제 항구였다.

그곳에서 열강 해군의 위용을 목격한 손원일은 장차 조국이 광복되면 자신의 손으로 해군을 창설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게 된다. 바다를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소년 손원일은 꿰뚫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손원일은 선구자였다. 대한민국 해군 역사의 첫걸음은 손원일이 중앙대학교 항해과에 입학했던 그 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혹자(或者)는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다. “손원일이 없었더라도 대한민국 해군은 창설되었을 것이다.” 아주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만약 손원일이 없었다면, 해군의 출발이 훨씬 늦어졌을 것이며, 출범을 했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눈부신 발전을 이루지는 못했을 것이다.

손원일은 미치광이였다. 그는 한평생을 오롯이 한 가지 목표에 매진했다. 그래서 손원일은 미치광이다. 미치광이처럼 오직 해군을 위해 살았기에, 사람들은 그를 ‘해군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손원일이라는 30대 중반의 청년이 해군을 건설하겠다고 동분서주할 때 그의 주변에는 그보다 나이 많고 경험 많은 사람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손원일 주변의 사람들은 주저 없이 손원일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추대하고 따랐다. 그가 미치광이처럼 한길로 나갔기 때문이었다.

영웅들이 추앙받는 이유는 하나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홀로 보고,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홀로 걷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손원일은 희대의 영웅이다.

광복 후, 국군을 만든 수많은 영웅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사람이 손원일이다. 독립운동가 손정도를 아버지로 둔 손원일은 성골(聖骨)이나 진골(眞骨)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육두품(六頭品)은 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손원일은 일본군계와 만주군계까지 서슴없이 품에 안았다. 그 이유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는 나라 없는 백성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6·25전쟁 중, 육군총참모장은 만주군 출신의 정일권이었고, 공군총참모장은 일본군 출신의 김정렬이었다. 그때 손원일은 정일권과 김정렬에게 “우리 의형제를 맺고, 나라를 위해 죽을힘을 다하자.”고 제안한다. 이유는 단 하나, 구국(救國)이었다.

그것은 손원일이 해방병단 시절부터 도별담(道別談)을 금지했던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손원일은 경상도니 전라도니 하면서 패거리를 짓는 자들이야말로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손원일은 한 마디로 가슴이 넓은 인물인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던 인물. 오로지 자신의 신념에 따라 해군의 초석을 쌓은 인물. 국군현대화의 기반을 다진 인물. 이런 면에서 볼 때 손원일 제독은 임진왜란(壬辰倭亂)에서 조선을 구해낸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에 필적하는 인물이라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국군 장병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군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 번쯤 읽어보라고 권할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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