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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그림찾기
  지은이 김해미
  출판사 지식공감
  판형 152*225
  발행일 2016. 07.
  정가 13,000원
  ISBN 979-11-5622-182



서양철학은 각각 다른 사람들의 각각 다른 삶의 양태에 존재하는, 혹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부단히 찾아오고 부단히 찾아간다. 김해미의 소설이 반가운 것은, 이러한 통찰이 작품마다 편안하게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통찰의 하나는 삶의 진실이고 다른 하나는 삶의 가치이다. 그녀는 각각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삶의 진실과 가치를 찾아간다. 삶의 진실과 가치는 너무나 단순하고 간단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단순하고 간단해 보이는 것은 그것이 이미 밝혀진 것만 보았기 때문이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사실은 너무나 간단하고 쉬워 보이지만, 탈레스가 이를 증명하기 전까지는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인류역사상 한 명도 없었다. <이등변 삼각형>에서 김해미는 통속적 인물 ‘박’의 삶을 보여준다. 김해미는 그의 이름조차도 제시하지 않은 채 그냥 ‘박’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상징이다. 이름 없는 ‘박’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통속적이고 세속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통속적이고 세속적으로 사는 사람은 존재의 가치가 없는가! 세상 사람들이 통속적이고 세속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한다면 그의 모든 삶도 통속적이고 세속적인가? 그래서 그는 마침내 존재의 가치도 없는 것인가? 이것이 김해미의 의문이다. 김해미는 스스로 제시한 의문에 해답을 제시한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김해미는 ‘박’을 비판하던 사람들 중의 아무도 이루어내지 못하던 결과를 마침내 이루어낸 ‘박’을 보여준다. 우리가 비판하는 세속적 통속적 근성이란 과연 정확한 비판인가? 그것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이 마지막 부분에서 김해미는 ‘세상 사람들이여!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선언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피론은 ‘판단중지(epoche)’를 주장했다. ‘사물의 객관적 본질은 파악할 수 없는 불확실하고 식별 불가능한 것이며, 어떠한 감관(監官)의 감각이나 판단도 그에 대하여 참이라고도 거짓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나는 그러한 사실을 적확한 현실로 제시한 <이등변삼각형>이 그래서 반갑다.

1952년 대전에서 출생.

  1976년 한남대학교 미술교육과 졸업.

  1993년 늦깍기로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좋은 그림찾기’ 로 등단.

  2016년 대일문인협회 10대 회장 선임.

          첫 창작집 ‘좋은 그림 찾기’발간.

<홀로 아리랑>은 치매에 접어든 ‘윤노인’이 치매가 더 심해지기 전에 가족에게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다가 마침내 제초제를 집어 드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아! ‘윤노인’의 자기 살인인가! 그러나 이 장면 다음에 단락이 바뀌고 단 한 줄의 문장이 더 제시되어 있다.



“달이 참 육시럴하게 밝았다.”



이 단 한 줄의 문장이 <홀로 아리랑>을 설명해준다. 이 작품 어디에도 아리랑은 없다. 아리랑 비슷한 흥얼거림도 없다. 생의 마지막 길을 안내해줄 제초제를 집어든 그 달밤만이 <홀로 아리랑>인 것이다. 그리고 그 달이 참으로 육시럴하게 즉, 찢어 죽이고 싶도록 밝았던 것이다. 여기에 작가 김해미의 해석이 묻어나온다. 제초제를 집어든 윤노인을 밝혀주는 달을 죽여 버리고 싶은 것이다. 왜일까? ‘윤노인’과 같은 부류의 근거 없는 자존심, 병이 들면 고통을 당해야 하는 당연한 섭리를 거부하는 삶의 진실과 전혀 관련 없는 그런 자존심을 위하여, 우리는 모두 제초제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미신이라는 돈과 권력. 이것이 제초제라는 것이 작가 김해미의 호소이고, 그 제초제를 남몰래 마시고 싶어도 달빛은 이를 만천하에 드러내 준다는 것이, 그 달을 찢어 죽이고 싶은 이유일 것이다. 아아! 고려시대 시인 이조년에게는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했던 달”이 21세기의 작가 김해미에게는 찢어 죽일 달이 될 줄을 그 누가 알았으랴!



<접붙이기>의 진실도 위와 흡사하다. <접붙이기>에는 작가의 문학적 결론이 보이지 않고 문학적 서술만 제시된다. 그런데 주인공의 삶이 진실인지 아닌지가 구별되지 않는다. 우리는 주렁주렁 감이 달린 감나무가 애초에 감나무였는지, 고염나무에 접을 붙여서 감나무가 되었는지를 모른다. 우리는 매실나무가 원래 매실나무였는지, 복숭아나무에 접을 붙여서 만들어진 것인지, 살구나무에 접을 붙여서 만들어진 것인지를 모른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감과 매실은 그 자체로 완전한 과실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볼 뿐이다. 그러나 식물학적으로 파고들면 그것들은 모두 원래 자신의 모습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나무의 진실, 알려고 하지도 않는 접붙인 나무의 진실. 그것이 작가 김해미에게는 삶의 문제로 다가온다. 보이지 않는 삶의 진실, 알려고 하지도 않는 삶의 진실을 돌아보자는 작가의 지적에 독자의 가슴은 조금씩 아려온다.



<좋은 그림 찾기>는 위에 거론한 작품보다 일찍 출세간(出世間)한 작품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찍 출가한 승려가 나중에 출가한 승려보다 먼저 성불한다는 보장이 전혀 없듯이, 작품의 나이를 굳이 문제 삼지 않는다면 이 작품은 위에 거론했던 작품과 외형이 조금 다르다. <좋은 그림 찾기>의 주인공은 속고 사는 부정의 삶을 이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 부정의 삶을 인정해버린다. 얼핏 이런 형식의 삶은 현실과의 타협이거나 패배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주인공은 철저한 부정의 삶 속에서 철저하게 화가로서의 자신의 삶을 이어간다. 그러다가 일어나는 대반전, 주인공은 그 부정의 삶 속에서 진실을 창조해낸다. 그렇던가? 더러움 속에도 정결함이 있다는 쓰레기를 뒤지는 소녀의 손길이 고울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 진실은, 거짓스런 삶에서도 싹터 나온다는 사실을 작가 김해미는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의 세계에서도 용감하게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황혼 이혼에 대하여>는 인간의 삶이 기하학적 도형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작품이다. 원이나 삼각형은 반듯하다. 그들은 각각 그들의 정의(定義)를 가지고 있고 그 정의에 충실하다. 그러므로 딱 보면 그 도형이 어떤 도형인지를 안다. 잘못 그린 원이나 삼각형을 우리는 재빨리 알아보고 심지어 잘못 그린 원인도 명쾌하게 지적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삶도 그런 것일까? 삶에도 유형이 있고, 그 유형에 대한 정의가 있고 그런 정의에 어긋나면 그것은 잘못된 삶이라고 지적할 수 있을까? 이혼이라는 삶의 유형이 존재하고 이에 대한 고정적 관념이 존재한다. 다행스럽게도 이혼의 정의는 법률에만 존재한다. 그러나 법률에도 황혼이혼에 대한 정의는 없다. 그러므로 황혼이혼에 대한 고정적 관념만 우리들 사이에 존재한다. 우리의 삶은 대개 이러한 고정적 관념의 지배를 받는다. 자아와는 전혀 무관한 공간적 사회의 고정적 관념이 감히 나의 삶을 지배하려 하고, 대개 그들의 지배는 성공한다. 이러한 지배는 타당하고 이러한 지배를 당하는 것이 순정한 삶인가? 그 경우에 자아는 내 삶의 어느 부분에 위치하는가?

작가 김해미는 삶은 기하학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황혼이혼에 대한 고정적 관념에 대하여 조용히 푸른 빛 저항의 깃발을 든다. 당신들이 설정한 관념적 유형이 실제로는 삶의 진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심지어 그 관념적 유형이 실제로는 순수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의 끝에서 작가는 여기까지 읽어준 독자에게 쌈박한 선물도 준다. 동서간의 고정적 관념도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이상의 작품들이 삶의 진실의 문제를 다룬 것이라면, 다음의 작품들은 삶의 가치문제를 다루고 있다.



<수의(壽衣)>는 새로운 가치의 발견을 다룬다. 그 가치는 우리의 옆에 항상 있는 눈만 뜨면 보이는 가치이지만 그러나 아무에게도 좀처럼 보이지 않았던 가치이다. 이러한 새로운 가치 발견의 순간이 석가모니의 보리수 아래서의 득도의 순간처럼 장엄하게 묘사되던가 아니면 최소한 충격적으로 묘사되기를 나는 기대했다. 그러나 작가 김해미는 이 부분을 너무나 밋밋하게, 전문적 비평가들이 보면 너무나 상투적이라고 말할 그런 정도의 서술로 마치고 있다. 한글만 알면 읽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문장이다. 그러나 나는 이 부분을 찬란하거나 장엄한 수식을 포기한 ‘겸허한 설명’이라고 부르고 싶다. 도연명은 이러한 자세를 ‘수졸(守拙)’이라고 했다. ‘온몸에 못남을 간직하다’라는 뜻이다. 나는 작품의 핵심을 이렇게 간결하고 쉽게 설명한 김해미가 갑자기 위대해 보인다. 김해미 만세! 이것이 내 평생 한 여인을 향하여 외친 유일한 만세다. 나는 선덕여왕이나 클레오파트라에게도 이런 만세를 외친 적이 없다.



<유나>라는 소녀는 암으로 세상을 떠나야 한다. 그 소녀는 더 살고 싶다. 그 이유는 ‘데이트도 해보고 나이트도 가보고 첫 키스도 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이것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야 하는 소녀 유나의 최대의 삶의 가치이다. 하릴없는 성교도 많이 해보고, 늙어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의미 없는 키스도 오지게 많이 해본 성인들에게 유나의 가치는 실로 덧없어 보인다. 그렇다! 실로 덧없어 보이는 가치에 대하여 김해미는 소설 <유나>에서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속삭이는 것으로 보인다. ‘당신들의 가치도 지서스 크라이스트나 고타마 싯타르타, 아니 보통 사람 노자나 공자, 맹자가 보면 이보다 더 덧없고 실없어 보인다구요. 뭘 유나를 보고 웃으시나요? 이제 유나에게서 웃음을 거두시지요!’

 

<봉호 오라버니>에서 작가는 놀라운 통찰을 슬쩍 보여준다.



‘나는 처음 할머니의 그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 할머니는 내겐 처음부터 할머니였으므로, 할머니에게도 청춘이 있었으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을 못해봤던 것이다.’



작가의 이러한 관점과 묘사는 탁월하다. 물리학에도 역사적으로 이러한 관점이 대립한다. 누군가 공중으로 사과를 던졌다. 사과는 최대한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가 물리학적 원리로 잠시 그곳에 머문다. 그리고 바로 떨어진다. 누군가 때마침 창문을 열었는데 그것은 사과가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사과가 떨어지는 것만 보고 사과가 왜 떨어지는지를 궁금해했다. 그리고 그 원리를 밝히고자 했다. 이것이 뉴튼 적 관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창문을 열었을 때, 사과는 최고 정점에 정지해 있었다. 그는 왜 사과가 저곳에 떠 있는지를 궁금해했다. 그리고 그 원리를 밝히고자 했다. 이것이 아인슈타인 적 관점이다. 그리하여 뉴튼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찾아냈고 아인슈타인은 만유인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와 달과 지구와 수많은 별이 왜 부딪쳐서 폭발하지 않고 우주에 떠 있는지를 우주상수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관점은 이처럼 세계를 바꾼다.

<봉호 오라버니>에서 주인공이 할머니를 바라보는 관점은 아인슈타인 적 관점이다. 할머니의 앞이나 뒤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날, 놀랍게도 주인공에게 뉴튼 적 관점이 제공된다. 할머니의 삶이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의 유일한 가치가 찾아진다. 바로 자신을 한번 찾아와준 <봉호 오라버니>의 한마디이다.



‘건강이 워나기 안 좋응께 언제 또 날 보러 올지 물러서 그려서 내 소식들은 김에 그냥 내려와 본 거랴. 나가 이렇게 건강하고 다복하게 자~알 살고 있는 거슬 보니 이제야 맘이 좀 놓인다고도 하더랑께.

시상에 있는 고상, 없는 고상 다 시켜놓고 마즈막에 나가 어렵사리 마련해놓은 집 두 치까지도 말아먹은 영감헌테도 한 번 못 들어본 말 아니여…. 아아, 참 따순 양반…. 내 살아생전 그 오라버니한테 그런 따수운 말 들어 봤응께 더 이상 원도 한도 읎어야….’



이것이 할머니를 할머니가 아니게 보이도록 한 한마디의 말이며, 할머니를 가치 있는 삶의 주체로 만든 단 한 마디의 말이다. 아아! 그렇다. 부모 처자 버리고 머리 깎고 입산수도하여 인류의 삶의 가치를 찾아가는 사람도 인류의 하나이고, 이 할머니도 인류의 하나 아닌가?



<동지미국 전(傳)>은 줄거리의 설정 자체가 너무나 보편적이고 너무나 흔해 빠져서 마치 삼류 영화 같다. 그러나 여기에서 작가는 그 흔해 빠진 세상의 가치를 확인해준다.



“이제 와서 지나간 일이 다 무슨 소용이냐고 하던걸요. 자기도 모르겠대요! 젊어서 피가 들끓어서 그랬던 거 같다나 뭐라나. 허긴 뭐, 이제 와서 확실한 대답을 들은들 어쩌겠어요? 이미 다 지나간 일인데. 그래도 그 한마디는 분명히 합디다. 세상에 태어나서 강 선배 가슴을 뜨겁게 했던 여자는 저 말고는 더 이상 없었다고요. 그것으로 족해요, 전.”



작가 김해미에게는 바로 이런 가치, 삼류 영화 같은 이런 가치가 어떤 사람에게는 바로 존재의 가치라는 사실이 강렬하게 인식되고 있다. 그러므로 감해미의 소설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갈 모든 가치가 인정된다.



이 글은 지금까지 김해미의 작품에 보이는 진실과 가치의 문제를 찾아보았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대개는 손쉽게 지나치는 삶의 단편들이 그녀에게는 소중하고 상큼한 문학의 주제가 된다. 그녀의 소설에는 엄중한 철학적 진실이나 장엄한 철학적 가치가 아닌, 우리 주변 사람들의 진실과 가치가 들꽃처럼 빛나고 있다. 들꽃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눈만 돌리면 언제나 행복할 수 있으니까. 그러한 진실과 가치에는 삼류영화 같은 것들도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러한 진실과 가치로 말미암아 그녀의 소설에는 진실과 가치로부터 버림받은 외로운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일상에서는 소외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김해미의 소설에서는 소중한 진실과 가치를 지닌 아담과 이브의 자손이 되거나, 전생의 인연으로 이 우주에 존재하는 별처럼 소중하고 빛나는 존재로 숨 쉬고 있다. 생각해보라! <봉호 오라버니>의 한 마디에 삶의 가치를 찾은 그 할머니의 한 생애를 누가 소외된 삶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으며, 세상을 뜨기 전 마지막으로 성직자의 첫 키스를 받은 <유나>의 꿈을 누가 무의미하다고 판정할 수 있겠는가? 김해미는 이리하여 마침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진실과 가치는 동등하다는 판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모든 진실과 가치의 질량도 동등한 것으로 그녀는 보는 것 같다. 이러한 결론은 참으로 반가웠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누구나 그 존재의 진실과 가치는 소중하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것이므로! 그러므로 모든 형태의 삶이 모두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것이므로! 이것이 내가 김해미의 소설에서 받은 가장 강렬한 인상이다. 고흐의 그림에 나오는 삼나무와 해바라기 같은, 좁은 캔버스에서 그들을 마구 움직이게 하는 남부 프로방스의 햇빛 같은 그 강렬함이, 오랜만에 만나는 그녀의 작품을 쉬지 않고 읽어가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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